합작 공개본

2017. 11. 28. 00:23카테고리 없음

"달이 참 예쁘지. 밤바람을 쐬고 싶어서 경치를 보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연락해 버렸네. 올 거란 생각은 못 했지만."

머리가 아프다. 지끈거리며 쑤셔오는 골을 꾹꾹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을밤의 차가운 공기가 폐를 저미듯이 스며 온다. 가슴이 답답하다. 너무 오랫만에 뜀박질을 한 탓일까?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린다. 너의 목소리는 이런 나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평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얄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참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든 나는, 그만 너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았다. 튀어오르는 물방울과 거기 투영되어 아롱지던 빛무리, 졸졸 흐르던 분수의 물소리. 그리고 그 턱에 걸터앉아있던 너. 계절에 맞지 않게 얇디 얇은 캐미솔과 가디건 한 장 만을 걸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던 빙그레 너의 그 모습을. 

"거짓말. 와 줄지, 시험해본 거야. 참 나쁜 여자지. 그래도 당신이 어째서? 처럼 촌스러운 질문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두 눈에 들어오는 그 풍경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현실감각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네가 나의 앞에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차라리 착각이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당연하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정말이지, 하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네게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반해버린 것은.



***



"저기, 프로듀서."
"아 네, 부르셨나요?"
"… 하아. 우리 이제 말 놓을 때도 되지 않았어? 난 처음부터 당신한테 존댓말 같은 거 안 했는데."
"그랬었나요? 기억이 잘 안 나서….."

평범한 평일 오후였다. 작성하던 문서 하나를 제대로 저장하지 않은 탓에 노곤한 정신으로 모니터와 씨름하고 있어야 했지만, 양만 많았지 단순히 기입만 하면 되는 내용들이었으니 대수롭지 않았다. 네가 걸어오는 말에 일일히 신경을 쓰면서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었다.
그래. 굉장히 따분한 오후이기도 했다. 어째선지 스케줄이 끝났음에도 돌아가지 않고 사무실 쇼파에 앉아있던 네가 그런 말을 던지지 않았다면, 책상에 엎드려 졸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평소에 뭘 해?"
"…저요? 보시다시피 프로듀서를…"
"알고 있어.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 물은 거야."
"……예?"
"당신은 우리 아이돌들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잖아? 프로듀서니까. 하지만 우리는 당신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건……"
"불공평하지 않아? 난…… 당신을 모르니까, 알고 싶은데."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불공평해? 그래서 알고 싶다고?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던 질문이었다. 굳이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데면대면한 프로듀서와 아이돌, 그 이상의 관계가 될 필요는 없었다. 솔직히,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하물며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가진 너였다. 세상 어느 직업보다도 구설수에 휘말리기 쉽다는 것은 자명하다. 인기가 많고 유명한 사람들과 친하면 친해질수록, 여러모로 신경쓸 것이 많아진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친하지도 않고 그리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제일 마음 편했다. 그리고 사무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내겐 너무나도 벅찼다. 그쯤에서 적당히 거절해 두고 싶었다. 아니, 거절해야 했다. 그런데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의 사고방식을 정면으로 반박당한 탓인지 자판 위에서 그대로 엉거주춤 멈춰버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너의 눈을 의식적으로 피하던 나를 질책이라도 하듯, 창문으로 내리쬐는 노을빛이 아직은 조금 따갑게 느껴졌다. 아마 너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 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으리라.

"…시험해볼수도 있어, 당신을."
"………"
"뭐, 당신이라면 그래도 화를 내지 않겠지. 물론 나도 그걸 정말 시험해 볼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야. 밤의 나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후후."

노을의 붉은 색이 스며버린 사무실에 네가 던진 선문답같은 질문이 파고들어왔다. 시험…이라니.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삼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당최 뭘 잘못했다고 네게 시험받아야 하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네 말대로, 화는 나지 않았다. 반발심의 영역에서 그친 그 감정은 어쩐지 자기방어적인 형태를 띄고 있었다. 거북이처럼 둔하고 그 등껍질처럼 두터워, 한번 숨어버리면 스스로 허락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두려워졌다.
그런 이질적인 풍경을 등지고 선 너는,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나섰더랬다.

"…아무리 숨긴다 한들, 비밀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야. 그럼."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은 이내 네 뒷모습을 완전히 가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던 내 얼굴도 서서히 달아올랐다. 감기도 걸리지 않았는데 열이 오른다. 영 이상했다. 어렸을 적 걸렸던 독감에 다시 걸려버린 기분이다. 어지러웠다.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두 볼에 손등을 얹으며, 나는 억지로라도 모니터에 눈을 돌리려 애썼다. 해결해야 했다. 반쯤 쓰다 커서만 깜빡거리는 이 문서도, 그리고 너의 행동 때문에 묘하게 들떠버린 나의 마음도.



***



이미 짙게 어둠이 깔린 퇴근길은 꽤 추웠다. 찬바람이 불진 않았지만, 냉랭한 공기는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양복의 겉옷 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곧 겨울이 올 거란 것을 경고하는 듯 했다. 그래, 어느새 계절이 또 한번 바뀌는구나. 의식하지 못한 사이 색바랜 낙엽들이 길바닥에 한가득 떨어져 있었다. 그 누구도 하늘을 보지 않고 걷는 거리에서, 덩그러니 밤하늘을 향해 솟은 휑한 나뭇가지들이 쓸쓸해 보였다.
잠깐. 갑자기 왜 쓸쓸하다고 느낀 거지? 그렇게 좋아하던 겨울이 오는 풍경이었는데.

분명 아까까지 잠잠하던 찬바람이 엄습했다. 아, 눈물나게 추웠다. 역시나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찬바람이 불어도 별 신경쓰지 않고 계속 가던 길을 갔을 텐데. 오늘은 평소같지 않은 일 투성이다. 추위에 떨려오는 몸을 붙잡고 늦가을엔 어울리지 않는 얇은 옷깃을 꼭꼭 여미다, 아까의 너와 나를 다시 떠올리고 말았다. 나도 가을을 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감기기운이라도 있는 걸까? 그래서 그렇게 열이 올랐던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결국 나는 밤길 한 가운데 멈춰서고 말았다. 나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의 그림자는 그 거리를 뛰어넘을 만큼 길었다. 그리고 무섭도록 매혹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버릴 듯한 어둠. 하지만 그 안엔 묘하게 날이 서 있다. 조금은 원망 섞인, 책임을 묻는 듯한 너의 속마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게 아니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거 아냐? 나에 대해서.

제멋대로 빨개지는 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이상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다. 네 생각을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다. 문을 닫고 사라지던 너의 뒷모습, 너의 의미심장한 말투, 도통 속마음을 모르겠는 너의 얼굴. 그 모든 것이 내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어쩌면 나는 이래서 너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이성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체모를 감정이 벅차올라 괴로웠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상이 온통 너로 보였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내 앞의 수많은 너는 나를 힐난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어지러운 나의 머릿속을 꿰뚫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에 표시된 발신인은 다름아닌 너의 이름이었다.

"여보세요? 나야, 카나데. 목소리가 듣고 싶어져서."

현실을 열심히 부정하고 있던 날 깨우기라도 하듯, 너의 목소리 뒤로 무언가가 졸졸 흐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물가 근처에서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추운 날씨에,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는 건지. 그새 자연스레 너의 걱정을 하는 날 발견했지만, 이제 그것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이런 야심한 저녁에, 네가 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중요했으니까. 이미 시뻘겋게 달아오른 볼은 추위 탓인지, 너의 목소리 탓인지 더욱 박차를 가해 빨개지고 있었다. 묘하게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네 이름을 입 밖에 내려는 찰나, 네가 먼저 말을 이었다.

"얼굴도 보고싶다고 한다면... 으응, 아무것도. 밖은 춥구나. 그럼 끊어."

말도 안돼. 너, 사실은 다 알고 있었던 거구나? 
전화가 뚝 끊겼다.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난 대체 왜,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돌아왔던 걸까? 멈춰 있던 발이 그제서야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멋대로 한 일이 아니었다. 그 발은 나의 분명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분명히 물가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 너를, 나는 찾아 나섰다. 찾아야만 했다. 눈치빠른 너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 테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또 그 두려움을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지. 프로듀서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나는 네게 한수 먼저 읽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할 수 있다면 전처럼 모르는 척 하고 싶기도 했으나, 이 감정을 스스로 자각해버린 이상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너와의 관계도, 예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겠지. 아마 눈을 돌리고 있을 때보다도 배로 고통스럽고, 괴로울 것이다. 그새 또 스멀스멀 차오르려는 두려움을 바람결에 흘려버리려는 듯이, 나는 속도를 올려 가며 달렸다. 찬바람이 옷 속으로 미친 듯이 스며들어 왔지만, 옷매무새를 가다듬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줄곧 모르는 척 해 왔던, 꿈 속 이야기처럼 여겨 왔던 이 감정을 드디어 마주볼 수 있었으니까. 가슴이 뻥 뚫린듯한 이 후련함을, 우물쭈물하다가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저 네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숨이 멎도록 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름아닌 하야미 카나데, 너를 만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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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마스 여성Px아이돌 합작에 낸 글입니다
처음 합작 참여해서 어색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뿌듯하네요 헤헤